꽃 찾아 길 따라/전북과 부안 여행

서낭댕이 장터와 그리고 귀무덤

긴 봄 2018. 3. 28. 09:53

서낭댕이 구장터와 그리고 귀무덤

 

정유재란이 발병한 15973~4월에 진달래 개나리 피어나는 봄날 남부안(줄포만)의 중심지 보안의 서낭댕이 장 열린 날 

전국으로 팔기 위해 가마에서 갓 꺼낸 백자를 파는 사기전, 놋그릇을 파는 유기전, 사기 가마에 팔기 위해 장작을 지게에 지고 온 내변산의 나무꾼

시조부 제사를 위해 어물을 사기 위해 장에 나온 아낙, 엄마를 따라와 어름과 살판에 넋이 빠져 보고 있던 코흘리개 등 

장터의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 도자기를 약탈하기 위해 외포에 배를 대고 들이닥친 왜군에 의해 이리 저리 몰리며 학살당하며 

전라도 최대의 사기전은 모두 약탈당하고 방화 파괴되어 버린다

이 후 구 장터로 불리며 그 때 희생자들을 매장하여 공동묘지가 되어 버린다.

 

보안장터를 약탈한 왜군들은 부안에 더 많은 도자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부안을 향해 북상하다 

지금 코무덤이 있는 일명 호벌치라는 유정자 고개에서 부안과 흥덕 의병 700여명과 조우한다

삼면이 산이란 지형의 이점을 살려 게릴라전을 펼친 의병들은 온 가족 가문전체가 전투에서 전사하면서까지 왜군의 부안 침탈을 막아냈다.

3000명 중 2000여명을 잃은 왜군들은 부안을 포기한 채 전사한 의병과 장터에서 베어낸 코와 약탈한 도자기를 챙겨 남해안 본거지로 퇴각한다.

정유재란의 8월 발병보다 빠르다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은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기도 하듯이 

휴전기 중에 비밀스러운 소규모 약탈행위는 자행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이때의 기록을 토대로 유천리 청자 가마들을 도굴 수많은 국보급 청자를 도둑질해 갔는데 지금도 공개를 않고 있다

해방 후 이화여대에서 유천리 가마군을 재 발굴하여 국보급 청자들을 발굴하여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유천리 청자는 고려시대 11세기부터 고려 최고의 청자를 굽기 시작하여 14세기까지 절정을 이룬다

이시기엔 동양 삼국 모두 차문화의 절정기에 해당하는데 투차 대회가 있어 

서로 차의 거품숫자와 흰색에 가까운 포말이 많은 쪽이 이기는 겨루기이다.

차는 찌고 말리는 행위를 여러 번 하여 차색을 하얗게 만들어 다시 전차로 만들어 

마시기 전에 불에 살짝 구어서 다연(차맷돌)에 갈아 가루를 내어 청자 다완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격불하여 거품을 일으켜 서로 우열을 가렸다.

이때 흰 거품을 감상하기 좋은 다완이 청자 다완이다.

명은 주원장의 명으로 차 재배 농민들의 노동 착취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제다 방법을 잎차 형태로 획기적으로 바꾼다

전차를 만들어 가루차를 내어 마시는 번거로움을 벗어나 바로 우려 마시는 잎차와 떡차 형태로 발전하였다.

일본은 장군가와 무사 사이에서 주종관계와 충성심 확인 차원의 집단의 가루차 마시기가 유행이 되며 

녹색 가루차로 만들어 마시면서 분청 다완이 인기를 끌며 조선에 대량 제작 주문하여가져 간다

임진란 이후에는 도공들을 납치하여 자체 생산하므로 도자기 주문이 사라진다.

현재 조선에서 만든 많은 다완이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황실의 쇠락과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위한 군선조선소가 곰소에 생기며 

청자에 변화가 생기며 여말 선초에는 분청사기를 굽기 시작한다.

강도가 약한 분청사기는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신흥사대부의 순백 선호와 강도가 더 강한 백자로 옮아가며 

가마도 백자를 굽기 좋은 흙이 나오는 곳을 찾아 부안 전체와 수요가 있고 가마 요건이 맞는 곳을 찾아 전국으로 퍼져갔다.

 

호벌치란 백제부흥군이 당나라 소정방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하여 胡伐峙라 명명했다.

부안은 문화와 호국의 고장이여!


부풍향차보를 고증하여 복원한 청자 차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