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찾아 길 따라/전북과 부안 여행 81

파어무늬 찻사발

고려청자 음각파어무늬 찻사발 고려의 차인들은 어떤 상상을 하면서 차를 마셨을까?파란물결에 부서지는 차색귀백의 흰파도 속에 노니는 물고기를희롱하며 마시는 차맛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고려 도공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기상천외한 발상은차인들을 장춘동의 봄 바다속으로 풍덩 들어가게 만들어 주고 있다.변산제다에서 내려 보이는 부안청자빅물관은 다완을 닮았다.부안은 고려까지 개경의 관문인 벽란도 다음으로 번창했던 곳이다.장강의 입구까지 가장 빨리 갈수 있으며항주와의 항로도 사국시대 이전부터 무역과 여객항으로 매우 활발한 곳이었다.

부안청자박물관은

지금 부안청자박물관에서는 5월 17일부터 11월 30일까지한국 전통도자 찻사발 그릇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11세기 청자 차도구부터 근현대 도예가분들의 작품이전시되어 있다.찬란한 고려의 차문화와 결합한 청자와 백자들그리고 조선 초기의 분청과 어우려진 부안의 차문화는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부안청자박물관만의 독특함 일것이다.변산제다와 가까워 자주 찾으며부풍향차 복원에 참여하며 학예사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부안청자박물관은

산들강바다가 어우러진 다채부안은 지금 부안청자박물관에서 동원 이홍근님이 기증한 청자와 예술성과 작품성이 뛰어나지만 도공들의 눈물과 한이 서린 고려청자 조각들의 전시회가 제25회 스카우트 잼버리대회 개막전을(8.1~12일) 앞두고 위대한 하늘빛, 부안 고려청자 2023.7.28~11.30까지 열린다. 학예사님이나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면 당시의 고려청자 가마에 온 느낌을 받는다. 부풍향차보존협회 변산제다의 긴봄은 잼버리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대회 기간 동안 청자 판매장에서 부안차 홍보를 위해 시음과 반값 판매를 한다. 다군사와 다모가 필요한 차자리용 의자 무게가 만만치 않다. 사이즈로 구분해 보면 여성용이란다. 잔과 상감과 철화상감이 아름다운 잔받침 고려백자 오리연적과 개구쟁이 남생이의 표정이 압권이..

장문리 5층석탑

1500년을 묵묵하게 자리하고 있는 정읍고부면 장문리 백제5층석탑을 찾아갔다. 왜구에게 교육받은 어느 사학자가 표지판에 백제식이란다. 지방색이란다. 이런 단어 만들지 말고 백제탑들이 왜 외탑이 많은 것을 연구해 봐라. 사유지에 서 있지만 어느곳 하나 손상된 곳이 없다. 지역민들의 유산 보호 의지가 훌륭하다. 백제의 석탑은 꼭 사찰에만 세운것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익산의 왕궁리 왕궁터의 석탑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된다.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정확한 좌우 대칭을 보이며 한치의 기울림도 보이지 않는다. 북쪽에서 봤다. 너른 고부뜰을 아우르며 북풍에서 비껴나 따뜻한 위치에 자리함을 알수 있다. 서쪽에서 본 모습이다. 두승산이 보이며 내륙으로 넘어가는 천치가 있다. 나름 당시에는 교통의 요충지었을 것이다..

원효방

변산제다의 긴봄은 우리나라 차역사에 한획을 긋고 있는 부안 개암사 뒷산의 우금바위에 자리하고 있는 원효방을 찾아 갔다. 사포성인과 원효대사의 차에 얽힌 기록이 전해 오고 있는 장소이다. 원효방의 주실로 왼편에 물웅덩이의 흔적이 있다. 삼국유사와 남행월일기의 기록에는 사포성인이 간절하자 웅덩이에서 우유같은 석간수가 나와 원효대사께 차 공양을 했다고 한다. 남행월일기에는 이곳에 나무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기록하였다. 지금은 사다리는 없고 흔적만 남아있다. 주실옆의 작은 수행실이다. 비바람을 막기에는 깊이가 얇다. 굴을 뚫은 감실이 있고 아래에는 시멘트로 만든 좌대가 있다. 원효방의 전면은 남쪽이다. 문화재는 아니지만 정신문화유적의 자격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전북의 차문화가 약해서 이런 유산을 방치..

지사리 고분군

정읍 영원면 지사리에는 관리가 엉망인 백제의 고분군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를 내면서 산자락을 따라 형성된 여러개의 고분중에서 가장 크고 넓은 고분을 의도적으로 반토막을 내고 길을 만들었다. 한강에서 밀려난 백제의 왕족 중에 일부가 이곳으로 내려 와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 기술하고 있다. 이곳은 백범 김구선생의 3의사 중 한분인 백정기의사의 세거지가 있고 모퉁이만 돌면 동학혁명의 발원지 고부현이 위치해 있다. 일제는 이곳이 굉장히 꺼끄러운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 고분은 북쪽으로 외따로 떨어져 있다. 독특한 형태이다. 표지판 뒤로 절반이 깍여나가고 높이도 낮아진 고분이 처량하다. 일제는 길을 일부러 구부리면서 고분을 훼손 시켰다.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네도 무지와 행정의 편의주의로 훼손에 일조했는지 ..

은선리 돌방무덤 19호와 미지정 무덤

부안의 원효방과 의상봉에 대한 기록이 있다. 원효와 의상이 중국으로 불경공부를 가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날이 저물어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잤다고 한다. 원효가 목이 말라 손을 더듬으니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 시원하게 마시고 다시 잠을 잔 후 다음날 아침에 물바가지를 보니 사람의 해골이었다고 한다. 이 정도 크기면 장정 3명은 너끈하게 눌수 있다. 원효가 중국에 유학을 가던 시기와 돌방무덤이 형성됐던 시기는 200여년 차이가 난다. 위례에서 사비로 내려왔던 시기로 일부 왕족 그 추종세력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했을 확률도 높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어설프게 보일지 몰라도 그 시절에는 이 정도의 무덤을 만들려면 지배층에 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돌방무덤의 형태를 보면 흙으로 덮었던 것도 있고 그냥 돌판이 ..

은선리 마한백제의 석탑

변산제다의 긴봄은 이런 생각을 한다. 백제 땅에 남아있는 석탑은 거의 고려 때 석탑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고려 때 조성된 석탑도 있겠지만 한눈에 봐도 백제의 탑을 고려의 탑이라고 한다. 고인돌을 만들던 DNA가 마한백제의 피에는 흐르고 있어 그 결정체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석탑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은선리 석탑은 백제 초기석탑과 중기의 혼용쯤으로 여겨진다. 정읍에 있는 백제의 초창기 형태를 띤 석탑들은 한기씩만 서 있는 경우가 많다.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찰의 석탑은 거의가 쌍탑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왕궁리 석탑처럼 은선리도 지방 왕족의 궁궐터가 아닐까도 뒷산의 수백기의 돌방무덤과 건너편의 왕릉급 능을 보며는... 건너편의 산에도 훼손되고 묻혀서 방치되고 있는 돌방무덤들이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