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제다 529

변산제다의 원추리

변산제다의 개울가로 습기가 많은 곳에 있는 원추리들이 노랗게 피어나고 있다.언제나 그자리에서 장마가 찾아오면방긋하면서 자라서 꽃망울을 터트려 준다.어느해인가 뒷산의 자생지를 찾아갔더니많은 개체들아 사라져버리고 울창한 송림으로 덮여 있었다.이 땅의 야생화들을 자연 상태에 방치하는게 옳은지 생각해 본다.기후변화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식물들을자연보호라는 미명으로 멸종위기로 놔두는게 맞는지 생각케 한다.

25년도의 산반 삼지닥나무

어느날 나에게 다가온산반무늬의 삼지닥나무는아주 사부작스럽게 자라고 있다.잎의 크기를 보면 완전히 자리를 잡았는데가지들이 쑥쑥 자라지 않아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사)부풍향차보존협회와 변산제다는1750년대 부안현감 이운해의 부풍향차보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차와 한약제의 기능성과 약효가 현감이 제시한 7가지 병증에 유효한 효과를 미치는지알기 위해 많은 논문들을 살펴보고 있다.

올해의 하늘말나리는

본분을 잃어버린 장마는멋대로 비를 뿌려대더니불볕 더위에 자리를 내주고한반도에서 사라져 버렸다.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주변에 있는대밭의 죽순을 잘라내고변산제다의 정자 아래 자리한 소나무 밑에 있는하늘말나리를 찾았다.통령이 바뀌니 꽃이 더 풍성해졌다.소나무 아래 자리하여 다른 식물들과 경쟁을 하면서 자라느라한껏 번식을 못하고 개체수가 늘어나질 않는다.해마다 주변의 식생을 잘라주어햇볕을 받게하여 주니 해마다 꽃을 피워주고꽃대를 한개씩 늘어난다.산속의 개체들은 다른 식물과의 경쟁과커다란 나무들의 그늘 때문에 생존하지 못하고도태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부디 너는 죽지 말고 많이 번식해 주라.

편백숲 가는 길에 솟대를 세우다

차밭이 위치한 위쪽에 편백숲이 있는 골짜기는 도적골이라 부른다.동학혁명 이후 쪽바리와 그 앞잽들이소위 남선 토끼몰이을 하던 때에호벌치에서당나라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를 1만명이나 죽여부여로 향하던 발길을 잡아두었던 빛나는 백제의 후손이자정유재란 때는 왜구인 쪽바리들을유격전으로 1000여명을 죽였던 기상을 물려받은 부안의 동학혁명군들은 독립군으로 변신하여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의 13조창인 안흥창의 명맥을 이어 온보안면 유천리와 남포리에 걸쳐 열리던 구장터에서독립투쟁의 물자를 조달하여 이동한 코스가변산제다 뒷산에 위치한 도적골이다.이 후 독립군의 투쟁에 지친 쪽바리들은 남부안의 중심을 보안면에서 줄포면으로 옮기면서구장터를 흔적도 없이 파괴하고 장터도 이전해 버린다.또한 부안은 부안읍과 줄..

홍매화

붉으니까 홍매화지염병헐 놈이 개미친짓을 허는 통에기후변화와 겹친 날씨가꽃마저 제때 못피게 한다.인자사 쪼끔 피어난다.꿀벌도 몇 마리 보이도 않는다.농촌에 일손이 없어 풀만 보이면 제초제를 뿌리고작물을 심는 순간부터 살균,살충제를 뿌리는 통에기후변화와 겹쳐 꿀벌들이 통채로 죽어 나가버린다.진짜진짜 양봉농가에 미안한 말이지만 꿀 사먹기가 두렵다.물론 양봉농가의 책임은 절대 아니지만우리니라의 현실이 이런데 어이하랴유기농업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자

궁금했쪄?

용맹과강했던 무더위가이틀에 걸린 비내리기로 꼬리를 말고가뭄에 쪼그라들었던비늘줄기가 물을 빨아 댕기자연분홍 줄기를 하늘 향해 뻗어 올리며온 세상에 붉은 주단을 깔아준다.올봄에 완공한 트리하우스이다.4~6인 정도가 앉아 차마시기 좋게 꾸며져 있다.변산제다의 산책로를 따라 2줄 또는 이렇게 3줄로 꽃무릇이 심어져 있다.가끔은  차나무 사이에서 피어나기도 하고올해는 꽃피는 시기가 늦어서 차꽃과 함께 피고 있다.차나무 정지작업의 마지막 구간을 끝내고 촬영을 들어갔는데갑자기 구름이 몰려온다.그래도 눈이 정화되니 좋다.몇년 전에 차이랑 사이에 식재해 놨더니 이제 보기 좋게 자리 잡아간다.차밭 가운데 산책로도 활짝 피어났다.제다실 뒷편도 석산은 활짝 피어났다.이번 주말이면 화무십일홍이 되겠다.ㅎㅎㅎㅎ 어딘지 잘 모르는..

고려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찻사발

고려청자 상감 구름학무늬 찻사발이다.겉면은 연화무늬에 구름이 있고 국화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안면은 학들이 구름위를 노릴고 있다.변산제다가 있는 유천리는 고려 때는 최고로 번창한 고을중에 하나인 보안현이었다.일제 강점기 전까지 유천리에는 구장터로 불리고 있는 전주목 최대의 장 있었다.일제는 변산반도의 의병들이 투쟁 물자를 이곳 장에서 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치안을 이유로 보안면의 장터를 폐쇄하고 줄포로 옮기면서 부안에는 경찰서를 두 곳에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