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해 3

부안현감 이운해의 실사구시

이운해는 부안현감으로 1754~56년까지 재직하였다.그 때 차를 이용할 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그 당시에 가장 흔한 병증 7종에 대해 차와 한약제를 혼합하여부풍향차를 만들고 그 기록을 남겨 부풍향차보라 명명하였다.그리고 부안의 대표적 산업이던 도자기산업에도 관심을 두었다.부안은 고려청자의 주산지였으며 몽골의 지배하에서는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설치되어 일본정벌을 위한 배를 건조하였다.이 시기 고려의 청자는 쇠퇴기를 맞으면서 땔감이 부족하게 된 부안청자는 급속하게 해체된다.조선에 들어선 부안은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풍부한 백토와 황토를 이용한 옹기와 항아리 등을 만들고 유통하는 전라도 지역 최대의 도자기시장을 형성한다.고려 때 안흥창이 설치되었던 보안면 유천리에서 정유재란 때 왜구의 피해..

부풍향차보의 재해석 1

조선의 대문장가이자 외교관이며 사상가였던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부안의 차를 극찬하였다. 100여년 후 부안현감으로 부임한 이운해는 차를 이용할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 당시 일반적 병증 7가지에 대하여 차를 이용하여 증상에 따라 한약재를 우린물을 섞어 차를 지었다. 부안의 별칭을 붙여 부풍향차보라고 명명하였다. 중국 한나라의 수도 함양을 보위하던 성읍의 명칭인 좌 풍익 우부풍에서 따와 조선 왕가의 본향 전주를 보위한다는 의미로 부안을 부풍으로 부르며 객사를 부풍관이라 하고 현판을 걸었다. 이는 임진, 병자 양난 이후 조선에 몰아닥친 소중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성읍에 중국 한나라의 성읍명을 별칭으로 부르던 영향이다. 부풍향차보 원전은 전하지 않고 현 고창의 성내면에 거주했던 조선 후기의 달필가이자 한천 ..

부안의 차는 역사다.

변산제다에서 멀잖은 도시에서 제다 체험을 왔다. 한국의 차문화사에서 전북을 부안을 제외하고 갈 수는 없다고 그 당위성을 얘기했다. 차를 공부하다 보면 그 지역의 역사를 꿰뚫게 된다. 문학이든 농학이든 리학이든 모두가 해당된다. 1755~6년 쯤에 부안현감인 이운해는 부풍차보를 저술했다. 7가지 병증에 유효하다는 약제 우린물을 차와 혼합하여 만들고 그 방법 등을 글로 남겼다. 특히 그는 누구도 다루지 않은 차도구를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를 성내사람 황윤석이 이재난고에 적어 놨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다. 부정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가당착이다. 인정해야 한다. 약제 우린물을 혼합했다고 하여 차가 아니고 약이라 하며 다서가 아니다고 우기면 우리나라엔 다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