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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다정의 고찰

긴 봄 2010. 8. 20. 13:40

唐代 茶政 考察

 

조 기 정

목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唐代 차 문화 槪觀

1. 차 산업의 흥기

2. 차 문화의 형성

Ⅲ. 唐代 茶政 考察

1. 茶政에 대하여

2. 茶政의 내용

Ⅳ.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1) 논밭에서 재배하는 차나무는 농수산부에서 관리하고, 산에서 자라거나 재배하는 차나무는 산림청에서 관리한다.

2) 우리의 차 문화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애환을 함께한 자랑스러운 전통문화이기 때문에 해방 이후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자유선진당의 이명수 의원 등 10인이 2010년 3월 16일에 국가 차원에서 ‘전통 차 문화의 보존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제안했다.

4) 전통 차 문화를 보존하고 진흥시키기 위한 법안이 제안된 사실을 통해 해방 후의 우리의 차 문화도 이제야 비로소 형성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5) 차 문화의 형성여부를 판단할 때 보통 5가지의 표준을 가지고 따지는데, 5가지의 표준 중 마지막에 상부구조가 되는 茶政의 시행여부가 있기 때문이다.

6) 茶政이란 ‘국가나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는 차 문화 政策이나 法規 또는 制度’를 의미하는데, 통과를 전제로 국회에 제안된 ‘전통 차 문화의 보존 및 진흥에 관한 법률안’도 茶政의 범위에 속한다.

7) 우리의 차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고려시대에도 茶政이 시행되었는데, 茶房과 茶軍士 그리고 茶所와 각종 茶禮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8) 唐나라에서도 중기 이후에 차 산업이 흥기하고 차 문화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茶政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9) 우리 차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法規의 제정이 필요한 시기에 과거에 시행되었던 각종 茶政을 고찰하는 것은 이를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10) 本考에서는 唐代 중기 이후 차 산업이 흥기하고 차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唐代에 시행되었던 茶政의 종류와 내용을 고찰한다.

Ⅱ. 唐代 차 문화 槪觀

1. 차 산업의 흥기

 

1) 唐代(619-907) 차 산업의 발전상황을 개괄적으로 서술한 저작으로는 楊華가 856년에 쓴 ≪膳夫經手錄≫을 들 수 있는데, “開元(713-741)과 天寶(742-756) 年間에 점점 차가 있게 되다가 至德(756-758)과 大曆(766-779) 年間에 마침내 많아지고 建中(780-783) 이후에 흥성했다.”는 내용이 있다.

2) 封演이 쓴 ≪封氏聞見記≫에도 唐代 중기에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고 차의 소비가 크게 증가한 상황이 기술되어있다.

3) 唐代 중기 이후부터 차 산업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全唐詩≫와 ≪全唐文≫ 등 각종 사적의 기술과 일치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4) 唐代 차의 생산지는 陸羽가 그의 ≪茶經≫ <八之出>에서 ‘八道四十三州’라고 밝혀놓았는데, 대체적으로 근대의 茶産區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膳夫經手錄≫의 기록에 따라 唐 宣宗(847-859) 때의 산지별 차의 종류와 특징 그리고 주요 판매지역 및 생산과 소비량을 조사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차 산업현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6) 白居易의 名詩 <琵琶行>에 茶商인 남편이 차를 사러 浮梁에 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 浮梁은 東南지역의 최대 차 집산지로, 매년 700만 바리(馱)의 차가 나며, 15만여 貫의 차를 세금으로 바쳤다.

7) 차의 생산과 소비가 늘고 교역이 증대되면서 차를 매매하는 茶市와 차를 싣고 내리는 茶埠 그리고 찻집인 茶肆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심지어는 長江水系에서 배를 이용해 도적질을 하는 다양한 규모의 이른바 江賊이 출몰하기도 했다.

8) 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차를 생산하는 지역도 점차 확대되었는데, 巴蜀에서 시작된 차의 생산지가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唐代 중기 이후 차의 생산과 기술의 중심은 長江의 중류와 하류까지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9) 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서북지역의 광대한 소수민족에게 차를 판매하는 이른바 邊茶貿易도 매우 흥성했다. 이러한 邊茶貿易은 처음에는 사신들을 통해서 행해지다가 나중에는 직접 상인들에 의해 차와 말을 바꾸는 이른바 茶馬貿易으로 발전했다.

10) 차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 ① 경제와 문화적 영향 ② 陸羽의 倡導 ③ 불교와 도교의 영향 ④ 기후조건

2. 차 문화의 형성

 

1) 차 문화의 형성여부를 판가름하는 5가지의 주요한 표준: ① 차의 생산규모 ② 과학적 이론체계 ③ 정신영역에서의 성과 ④ 著作成果 ⑤ 茶政의 시행여부

2) 唐代 중기 이후부터 茶政이 시행되기 시작했는데, 5가지의 주요한 표준을 통해서 차 문화는 唐代 중기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3) 차 문화가 唐代에 형성된 원인: ① 불교가 크게 발전함 ② 엄격한 과거제도의 시행 ③ 作詩의 풍조 성행 ④ 貢茶의 시행 ⑤ 禁酒조치 ⑥ 陸羽의 倡導

4) 唐代 차 문화의 특징: ① 煎茶法을 핵심으로 하는 일련의 茶藝技法을 확립하여 茶藝의 美學과 境界 그리고 분위기 등을 강조함 ② 인간의 정신을 茶事와 상호 결합시켜 인간의 품격과 사상의 지조를 강조하고 인간과 차의 합일을 중시함. ③ 茶事활동을 儒․彿․道의 사상과 상호 결합시켜 중국 다도정신의 기본 틀을 다짐. ④ 다도정신을 자연산수와 상호 연계하여 차인이 대자연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느긋하게 펼치고, 너그럽고 포용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받아드리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天人合一을 중시함. ⑤ 문인들이 차를 소재로 하여 시를 짓거나 차를 소재로 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많은 茶詩들이 발표됨.

 

 

Ⅲ. 唐代 茶政 考察

 

1. 茶政에 대하여

 

1) 중국 고대의 茶政은 곧 官府가 茶葉經濟를 관리하고, 茶葉의 생산과 판매 그리고 경영의 이윤을 장악하는 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고대에 관리했던 禁榷制度 ․ 官工業制度 ․ 財政制度 ․ 邊境貿易制度 등이다.

2) 茶政의 의미를 정의하면 ‘차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경영 등을 관리하기 위해 국가가 시행하는 제도 ․ 정책 ․ 법규 등을 말한다.

3) 茶法은 ‘중국의 봉건정권이 茶葉에 대해 징세 혹은 전매를 실시한 정책적인 법규’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구분하면 茶政의 범위가 茶法보다 넓어 茶政의 범위에 茶法이 포함된다.

4) 차의 생산과 유통이 증대하고 경영과정에 막대한 이익이 발생하게 되면서 차가 통치계급들로부터 중시를 받게 되었다. 즉, 통치계급들은 차로 인해 발생하는 이윤을 수탈하기 위해 차의 경영방식에 대해 규범을 시행할 필요가 절박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미 마련된 차 상품이라는 튼튼한 경제적 기초 위에 茶政이라는 상부구조를 마련했던 것이다.

5) 禁榷制度 중에서 唐代에 시행을 시도했던 것으로 榷茶가 있고, 官工業制度 중에서 唐代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것으로 貢茶가 있다. 財政制度 중에서 唐代에 시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茶稅가 있고, 邊境貿易制度 중에서 唐代에 시행한 것으로 茶馬互市가 있다.

 

2. 茶政의 내용

 

1) 禁榷制度(榷茶)

(1) 榷茶란 국가나 官府가 차의 생산과 매매를 독점하는 것으로 주요 목적은 독점을 이용한 전매가격으로 고액의 재정수입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2) 榷茶도 茶稅의 한 형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제도는 文宗 太和 9년(835) 9월에 당시의 재상 겸 鹽鐵使였던 王涯의 건의로 嘉納되었다.

(3) 榷茶使가 된 王涯는 江南의 모든 차나무를 官府에서 경영하는 다원인 官場으로 移植하고 官場 안에서만 製茶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식을 하지 않은 차나무와 민간인이 비축해놓은 차는 모조리 태워버리게 했다. 王涯의 榷茶制는 상인과 茶農과의 거래를 금지시키고 官府로 하여금 생산과 매매를 독점하게 하는 완전전매제였다.

(4) 11월 21일 환관들을 제거하기 위한 李訓 등의 거사가 실패하면서 이른바 甘露之變이 일어나고 만다. 王涯도 이 사변에 연루되어 환관인 九士良 등에 의해 永昌里의 茶肆에서 붙잡혀 허리가 잘려 죽었는데, 榷茶制로 인한 원한으로 백성들이 그에게 기와와 벽돌을 던져 순식간에 더미를 이루었다. <七碗茶歌>로 더 유명한 <走筆謝孟諫議寄新茶>란 시를 쓴 盧仝은 茶友이자 榷茶使인 王涯의 집에 자주 들러 좋은 차를 마시며 시를 짓곤 했는데, 甘露之變이 있던 당일에도 王涯의 집에 留宿하고 있다가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5) 王涯가 죽은 후 令狐楚가 鹽鐵使 兼 榷茶使를 대신했는데, 王涯의 교훈을 받아드려 太和 9년 12월에 가혹한 榷茶制 폐지를 주청하여 윤허를 얻었다. 王涯의 榷茶制는 이렇게 해서 시작한지 2개월도 못되어 관철되지 못한 채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차를 官府에서 운영하는 官營의 선례를 열어서 榷茶制는 北宋 초기에 다시 실행된 이후 각 朝代의 중요한 茶政의 하나가 되었다.

 

2) 官工業制度(貢茶)

(1) 官工業이란 봉건등급제도를 지키고 통치집단의 특수한 생활욕구를 만족시키고자 官府가 조직적인 생산을 위해 마련한 수공업공장이다.

(2) 唐代의 顧渚貢茶院과 宋代의 建安官焙 그리고 元代의 武夷山御茶院 등은 모두 차의 생산구역에 관부가 설치했던 제다공장이다.

(3) 여기에 필요한 제다인력과 물자는 강제수단을 통해 민간으로부터 약탈했는데, 실제로는 官府가 백성들에게 강요한 負役稅와 實物稅였다.

(4) 貢茶가 정식으로 일종의 제도가 된 것은 唐代에 시작되었다. 貢茶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민간에서 생산한 土産貢茶로 土貢制度에서 세금으로 부과하는 賦稅茶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官府에서 설치한 제다공장에서 엄밀한 제작공정에 의해 만든 우수한 품질의 御用珍品茶이다. 위에서 말한 唐代에 제도로 정착된 貢茶란 후자를 가리킨다.

(5) 代宗 大曆 5년(770)에 湖州 長城과 常州 義興의 접경지역인 顧渚山 金沙泉 옆에 貢茶院을 설립해 전문적으로 貢茶를 만들었다. 雅州의 蒙頂山에도 貢茶院이 있었는데, 蒙頂貢茶는 仙茶라 불리며 평판은 매우 좋았으나 생산량이 적었다. 때문에 唐代의 貢茶는 대부분이 顧渚山의 紫筍茶였다.

(6) 顧渚山 북쪽은 江蘇의 宜興인데 고대에는 陽羨이라 불렀다. 肅宗(756-762) 때 常州太守 李栖筠이 陸羽의 추천에 의해 陽羨茶 萬兩을 황제에게 바쳐서 호평을 받았는데, 이것이 陽羨茶를 공물로 바친 시초였다.

(7) 顧渚山 貢茶院은 明 洪武 8년(1375)까지 605년간 지속되었는데, 그간 唐代의 규모가 가장 컸다. 인부는 3만 명에 달했고 기술자도 1,000명이나 되었다. 제다공장이 30칸이나 되었고 건조장도 100여소에 달했다. 매년 조정에서는 여기에 千金의 재화를 소비했다. 최초에는 萬斤의 貢茶를 湖州와 常州가 균등하게 萬串(一串은 半斤)씩 생산했다. 환관의 횡포로 貢茶는 부단히 증가하여 武宗 會昌(841-846) 年間에 이르러 顧渚山 紫筍茶만 이미 18,000斤으로 증가했다.

(8) 德宗 貞元 5년(789)에는 貢茶를 5개 등급으로 구분했다. 1등급은 가장 이르고 여린 찻잎으로 만들어 淸明節 이전에 반드시 京城인 長安에 도착해 궁중의 淸明宴에 사용하도록 제공된 차였다. 江南에서 장안까지 4,000 여리를 최대한 빨리 전송하기 위해 연도의 驛站마다 인부와 빠른 말을 대기시켜 주야를 쉬지 않고 달렸다. 그래서 1등급차를 急程茶라고 했다.

(9) 貢茶제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제다기술의 향상을 통해 차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3) 財政制度(茶稅)

(1) 고대의 재정수입은 대체로 正稅와 附稅 그리고 雜項收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附稅는 각종 전매수입과 工商雜稅 등을 포함한다. 附稅를 징수하는 범위는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등의 영역을 포함하는데, 附稅收入의 형태는 실물일 수도 있고 또한 화폐일 수도 있다.

(2) 德宗 建中 3년(782)에 戶部侍郞 趙贊의 건의에 따라 천하의 茶 ․ 漆 ․ 竹 ․ 木에 대해 10분의 일의 稅를 거두어 常平倉의 밑천으로 삼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茶稅를 징수한 것으로 중국 茶稅制度의 기원이 되었다. 세율이 10%였기 때문에 十一茶稅라고 불렀다.

(3) 興元 元年(784) 朱泚의 난으로 德宗이 奉天(지금의 陝西省 乾縣)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자 징세한 것을 후회하며 茶稅를 폐지하라는 조서를 내림.

(4) 貞元 9년(793)에 德宗은 鹽鐵使 張滂의 주청으로 다시 茶稅를 회복시켰는데, 이때부터 茶稅가 제도로서 정착되어 소금과 철 이외의 또 다른 고정적인 稅收가 되었다. 이때는 세금으로 거둔 차가 한 해 40만 貫을 넘지 않았다.

(5) 穆宗이 즉위한 長慶 元年(821)에 鹽鐵使 王播의 주청으로 3개항의 세법을 고쳤다. 세율을 15%로 올리고, 계절에 따라 분기별로 징수하고, 차 이외에 현금이나 비단 또는 곡물 등으로 납부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증세를 단행해 한 해 40만 貫이던 茶稅가 60만 貫으로 늘었다.

(6) 文宗 太和 9년(835) 9월 鹽鐵使 王涯가 차의 생산과 판매에 대해 완전전매제인 榷茶制를 시행하려 했으나 甘露之變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7) 王涯를 대신해 鹽鐵使 兼 榷茶使를 맡은 令狐楚의 주청으로 太和 9년 12월 榷茶制를 폐지하고 종전대로 10%의 茶稅를 징수했는데, 鹽鐵使를 경유하지 않고 州와 縣에 징수를 위임해서 바로 戶部에 납부토록 하였다. 이렇게 州와 縣에 茶稅의 징수를 위임하자 초과해서 징수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太和 末年(835)에 재상이 된 李石은 開成 元年(836)에 茶稅를 德宗 貞元 年間의 제도대로 복구하여 茶稅가 원래대로 鹽鐵使의 업무로 돌아갔다.

(8) 武宗 會昌 元年(841)에 崔珙이 鹽鐵使로 부임해 江淮지역의 茶稅를 재차 늘렸다. 그러자 여러 道의 觀察節度使들이 茶商들이 지나다니는 州와 縣의 要路에 邸 ․ 店 ․ 舍를 설치하고 重稅를 부과하였다. 통과세 성격의 이 茶稅를 過境稅 또는 搨地錢이라고 불렀는데, 징세과정에서 茶商들의 반발이 심했다.

(9) 宣宗 大中 6년(852) 裵休가 鹽鐵使로 부임해 稅法十二條를 제정하면서 過境稅 징수로 인한 백성들의 반발은 차차 해소되었다.

(10) 稅法十二條을 역사에서는 裵休茶法이라 하는데, 핵심은 당시 횡행했던 밀매와 탈세 그리고 밀매방조 등을 겨냥해 가혹한 형벌과 법률로 밀매자를 체포하고 배의 왕래를 자유롭게 하며 상인들이 안심하고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11) 이 稅法의 시행은 貞元 9년(793)의 稅茶제도를 회복하고 그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 세법의 시행으로 茶商과 園戶 모두 비교적 만족스러워했는데, 세액은 늘리지 않았으나 세수는 배로 증가하여 唐代의 최고기록인 80만 貫을 처음으로 달성했다.

 

4) 邊境貿易制度(茶馬互市)

(1) 邊境貿易制度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곧 茶馬互市制度이다. 좋은 말과 차를 교환하는 茶馬互市는 唐代에 시작된 일종의 무역제도로 이후 淸代까지 약 1,000여년 이상 이어졌다.

(2) 唐 玄宗 開元 19년(731) 靑藏高原을 점거한 吐蕃政權이 唐과의 접경지역에 互市를 열자고 요구를 하고서, 赤岭(지금의 靑海湖 東岸 日月山)에 交馬를 열고 甘松岭(지금의 四川 松潘)에 互市를 열자고 제안했다. 唐은 交馬와 互市를 모두 赤岭에 열도록 윤허했다. 정식의 茶馬互市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3) ≪封氏聞見記≫와 ≪新唐書≫에도 茶馬交易이 肅宗시기(756-761)에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초기의 茶馬交易은 소수민족의 朝貢에 대한 答禮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4) 德宗 貞元(785-805) 年間에 이르러 상업성의 茶馬交易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茶馬貿易은 宋代 神宗 熙寧 7년(1074)에 제도로 정착되는데, 매년 차와 교환되는 말은 1만-2만 필에 달했다. 보통은 名馬 한 필이 100-120斤의 名茶와 교환되었는데, 상황에 따라 350斤 또는 1,000斤과 교환되기도 했다.

(5) 통치계급들은 茶馬貿易을 통해 변방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소수민족의 호전성을 완화시킬 수 있어 이른바 以茶治邊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전투력을 강화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어 茶馬貿易이 내부통치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Ⅳ. 나오는 말

 

1) 차 산업의 흥기: 唐代 중기 이후 생산과 소비의 증대로 차 산업이 흥기하면서 교역이 발달하고 차의 생산지역도 長江의 중류와 하류까지 확대되었다. 차 산업의 발전 원인으로는 ① 경제와 문화적 영향 ② 陸羽의 倡導 ③ 불교와 도교의 발전 ④ 기후조건 등을 들 수 있다.

2) 차 문화의 형성: 차 문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① 차의 생산규모 ② 과학적 이론체계의 형성 ③ 정신영역에서의 완벽한 구현 ④ 충분한 저작성 ⑤ 茶政의 시행 등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唐代 중기 이후 이런 제반 요건들이 충족되어 차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차 문화의 형성원인: 唐代에 차 문화가 형성된 원인으로는 ① 불교의 발전 ② 과거제도의 시행 ③ 作詩의 성행 ④ 貢茶制 시행 ⑤ 금주조치 ⑥ 陸羽의 倡導 등을 들 수 있다.

4) 당대 차 문화의 특징: ① 煎茶法을 핵심으로 하는 일련의 茶藝技法을 확립하여 茶藝의 美學과 境界 그리고 분위기 등을 강조하였다. ② 인간의 정신을 茶事와 상호 결합시켜 인간의 품격과 사상의 지조를 강조하고 인간과 차의 合一을 중시하였다. ③ 茶事활동을 儒 ․ 彿 ․ 道의 사상과 상호 결합시켜 중국 다도정신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④ 다도정신을 자연산수와 상호 연계하여 차인이 대자연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느긋하게 펼치고, 너그럽고 포용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天人合一을 중시하였다. ⑤ 문인들이 차를 소재로 하여 시를 짓는 풍조가 성행하여 많은 茶詩들이 발표되었다.

5) 茶政의 종류: 중국 고대의 茶政에는 ① 禁榷制度 ② 官工業制度 ③ 財政制度 ④ 邊境貿易制度 등이 있고, 唐代의 茶政에는 ① 榷茶 ② 貢茶 ③ 茶稅 ④ 茶馬互市 등이 있다.

6) 榷茶: 835년 9월에 王涯의 주청으로 시행되었으나 甘露之變으로 王涯가 죽임을 당하자 관철되지 못하고 그해 12월에 폐지되고 말았다.

7) 貢茶: 770년 최초로 顧渚貢茶院을 설립하고 官府가 직접 茶園을 관리하고 전문적으로 貢茶를 생산했다. 蒙頂山에도 貢茶院이 있어 仙茶라는 貢茶를 생산했으나 양이 적어 대부분의 貢茶는 顧渚山의 紫筍茶였고 그 다음은 陽羨茶였다. 顧渚山貢茶院은 770년부터 1375년까지 605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唐代의 규모가 가장 컸다. 동원된 인부가 30,000명에다 기술자도 1,000명에 달했다. 제다공장도 30칸이나 되었고 건조장도 100여 所에 달했으며, 한 해 최고 18,000斤을 생산했다. 나중에는 貢茶에도 등급을 매겼는데, 가장 이른 봄에 생산해 長安 궁궐의 淸明宴에 제공하기 위해 한 달에 4,000여리를 달려야 하는 이른바 急程茶가 1등급에 속했다.

8) 茶稅: 782년 趙贊의 건의에 따라 최초로 10%의 茶稅인 이른바 十一茶稅를 징수하다 784년 잠시 폐지되었다. 793년 張滂의 주청으로 茶稅를 회복시켰는데, 이후 茶稅가 제도로 정착되어 소금과 철에 이어 고정적인 세수로 자리를 잡아 40만 貫의 茶稅를 거두었다. 821년 王播의 주청으로 세율을 15%로 올려 계절별로 분납을 가능하게 하고 차 대신 현금과 비단 또는 곡물로 대납하도록 세법을 바꾸어서 60만 貫의 茶稅를 징수했다.

835년 王涯의 榷茶制 실패 이후 令狐楚의 주청으로 다시 세율을 10%로 낮추고 州와 縣에 징수를 위임하여 鹽鐵使를 거치지 않고 직접 戶部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李石에 의해 그해 바로 茶稅의 징수가 鹽鐵使의 업무로 환원되었다. 841년 崔珙의 주청으로 江淮지역의 茶稅를 올리자 여러 道의 觀察節度使들이 교통의 요로에서 茶商들에게 통과세 성격의 過境稅(一名 榻地錢)를 징수했다. 茶商과 茶農들이 크게 반발하며 榻地錢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852년 裵休가 稅法十二條를 제정하여 당시의 문제점을 해결하자 반발은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세액은 늘리지 않았어도 세수가 배로 증가해 唐代 최고기록인 80만 貫을 처음으로 달성했다.

9) 茶馬互市: 731년 靑藏高原을 점령한 吐蕃政權이 唐과의 접경지역에 互市를 열자고 제안했는데, 赤岭에 交馬를 열고 甘松岭에 互市를 열자는 내용이었다. 唐은 交馬와 互市 모두 赤岭에 열도록 윤허하였다. 이때부터 정식의 茶馬交易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茶馬交易이 소수민족의 朝貢에 대한 答禮 차원에서 이루어지다가 점차 상업성을 띤 茶馬貿易으로 발전했는데, 德宗 貞元(785-805) 年間에 이르러 상업성의 茶馬貿易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