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차문화사
우리나라의 차 역사에서 고려처럼 널리 차가 보편화된 시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려는 차 문화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태조 왕건은 개경에 수도를 정하고 각 지방의 호족들과 결혼을 하여 혈연관계를 맺고
귀족 중심의 교종에서 벗어난 민중불교인 구산선문을 택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다연과 다시 등을 베풀어
지방 호족들의 무력을 약화시키는데 연회의 중심을 술이 아닌 차를 그 중심에 뒀다.
그리하여 왕실에는 다방을 두어 국가 대소사의 행사를 집행하게 하고 관료사회는 업무 시작과 끝
특히 사헌부는 중대한 판결을 할 때는 결정을 논의하는 다시를 갖게 하여 공정성을 높이게 하였다.
지방 호족들과 관료 사회의 음다풍과 사찰들의 여러 행사에서 다연을 열고
투차를 행함으로 인해 지방민들도 자연스럽게 차 생활을 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행사로 인해 소비되는 차를 국가가 체계적인 관리를 지속하지 않아 엄청난 양의 차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남부지방의 다소와 다촌을 주먹구구식 관리로 수탈을 일삼아 국가 기획의 획기적인 생산시책을 세우지 못했다.
중국차를 수입한 상류층은 이를 소비하는 행태를 자랑으로 여기는 등 국산차 생산을 등한시하여
차 산업이 지속적으로 육성 발전되지 못한 점이 매우 아쉽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의례와 사신 접대 궁중의 수많은 의식다례 등이 있었음에도 차의 생산과 제조 및 다구나 전다는
물론 당시에 유행하던 투차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고려의 송과의 교역은 문화적 측면이 강한 것이 특징이며 송의 입장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두려 했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주로 그들의 수준 높은 문화를 수입하는데 힘을 쏟았다.(차문화사 129~130쪽 이하는 책으로 표기)
우리의 민족혼과 주체성을 계승하기 위해 단군 조선에서 시작하여 부여, 고구려로
이어져 오던 정통성을 잇기 위해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자체 연호를 사용하는 등
신라의 중국 의존적인 행태와는 차별화하는 자주국가의 길을 간다.
하지만 만주 고토 회복을 외치던 북방진출 세력의 몰락과 원의 침략으로 인해 자주성을
급속히 잃어갔지만 왕실과 귀족들 그리고 이들의 비호 하의 사찰 등은 중국(원)의 정치
군사 문화와 직접 접하면서 차 문화를 비롯한 도자기 인쇄술 종이 등의 발달로 한반도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시대를 이룬다.
고려 차의 종류
고려가 송과의 교역 때마다 가져오는 것 중에는 중국인들이 아주 귀하게 여기는 북원산의 최고급 연고차가 반드시 들어 있었다.
그래서 송나라의 가루차 점다법과 투차가 고려 상류층의 차생활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 연고차의 제다방법은 차를 찌고 비비고 말리기를 반복하여 엽록소가 모두 빠진 흰색의 차가 최상품이며
갈아서 흰 찻가루를 청자 다완에 점다하여 흰 거품이 많고 오래 가는 방법으로 차 겨루기를 하였다.
하지만 송나라 휘종이 쓴 대관다론에 나오는 방법과 차이가 있었던 면도 보인다.
그리고 중국도 그렇듯 고려 사람들이 마시는 차가 전부 덩이차 종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차를 끓이는 용어나 그 차의 품질이나 계량단위 등으로 보아서 병차의 점다방법에서 쓰지 않는 용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11대 문종 이후 반세기 동안에 고려에서 수입한 송의 차양은 막대했으며
고려 자체에서 생산한 차도 상당량에 이루었다. (책132~133)
수입차로는 송의 대표적인 고급차인 용봉차 종류로써 용단봉병과 용단승설 같은 북원의
어원에서 만드는 최상급의 차를 수입하거나 사신의 답례품으로 받아왔다.
용단승설은 추사의 제자 이상적의 은송당속집에 대원군이 남연군의 묘를 성묘하고 고려시대 고탑 속에서
작은 금동불, 금을 입힌 경첩, 사리, 침단, 구슬 등과 함께 네 덩이를 얻었다 기록하고
자신도 그 중 한 덩이를 얻었는데 지름 5cm 크기의 단차에 용이 음각되어 있고 승설이란 글씨까지 음각되어 있다고 적었다.
최상급의 차인만큼 만드는 공정과 시간도 엄청나게 걸리는 것으로 조사되는 연고차이다.(책135)
고려의 자체 생산차로는 뇌원차, 유차, 대차 등이 기록되어 있다.
뇌원차는 고려의 대표적인 차로서 왕실에서 행하는 의식에는 물론 대외적인 공물 및 관료들에게 하사품으로 널리 쓰였다.
각 다소에서 공물로 바친 것을 모아 두었다가 국가 대소사에 사용했다.
뇌원차의 기록은 성종 8년(989)에 처음 사용되면서 점차 차의 사용량도 늘어난다.
뇌원차는 떡차이며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아주 고급의 차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채다하는 방법과 제다법등은 유실되어 알 수가 없다.
대차는 뇌원차나 유차를 따고 난 후에 만든 차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또 한 국가와 왕실에서 사용하였으나 차의 형태가 떡차인지 산차인지 알 수가 없다.
유차는 화개의 다소에서 진상했던 차로 이규보의 시에 자주 나오는 고급 단차이다.
이규보의 시로 인해 유차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내역이 유추된다.
첫째 차 이름은
입안에 닿으니 부드러워 애기의 젖 냄새 그대로구나 -
둘째 제다와 용품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찻잎 따고 불에 말려 한 덩이를 만들어 남 먼저 임금께 드리려 하네.
셋째 임금에게 진상한 최고급품으로 취급됨을 알 수 있다.
임금님 사신 편에 보내 왔다네 -
남 먼저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_
넷째 채다 시기와 재배지 환경을 알 수 있다.
시냇가 찻잎을 이른 봄 싹 트게 하여 황금 같은 노란 움 눈 속에 돋아나네.
한식 전에 딴 찻잎 많지 않아도 상 가득한 죽순과는 다르네. -
섣달의 차 싹을 평생 사랑해 강하게 쏘는 향기 코를 찌르네. -
다섯째 제다 방법과 그 어려움을 엿 볼 수 있다.
간신히 따고 불에 말려 한 덩이를 만들어 -
작설차는 어린 찻잎으로 만든 떡차 형태의 것으로 추정된다.
익재 이제현이 송광사의 주지 스님이 차를 보내준데 대한 감사의 시를 부치는데
이곳에서 우리나라 문헌에 최초로 작설이란 차 전문 용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작설이 산차인지?. 단차인지?, 고유 명사인지 일반 명사인지
분명치 않아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자순차는 송광사의 원감 국사가 쓴 산거라는 다게에 나오는데 다른 기록은 없다.
이 외에도 증갱차, 엄차, 로아차, 향차 등이 있으나 중국의 문헌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차종이나 채다 시기, 제다 방법, 모양 등에 의해 부르는 이름일 개연성이 있다.
백산차는 차나무가 아닌 석남과의 식물로 만드는 차로 백두산 근처에 자생하며
오래 전 고구려 이전부터 잎을 이용하여 차를 만들어 제천 의식 등에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중의 차 문화
궁중의 차 생활은 우선 대외적인 것으로 외국의 사신을 맞는 의례와 국가 간의 공물로 차가 오고 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인 행사로 연등회나 팔관회 또는 원회의나 군신의 등이 있었다.
궁의 일반적인 의례에 책태후의, 공주하가의 등 의례적인 것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책 158)
기관으로는 궁중의 의료와 함께 국가의 모든 차 행사와 궁중의 차 행사를 담당한 다방이 있었다.
또한 다방 군사들은 지금의 의장대와 호위병 역할까지도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너무 많은 다방 관원이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
신라와 발해보다는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차를 적극 권장하고 관장함으로써 왕실을 비롯하여
사대부와 사찰 및 일반 서민들까지 전 백성이 차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사원의 차 문화
고려는 초기부터 국가 시책으로 불교를 옹호하여 왕실이 열성으로 봉불하니
백관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사찰을 찾게 되었다.( 책 174쪽 )
왕실과 귀족들이 사원에 차를 공양하고 청규에 의해 80여 가지의 다례가 진행됨으로
음다 풍습이 널리 알려져 사찰의 배치에도 변화가 생겨 다당을 배치하기에 이루고
스님들의 음다와 투다까지 성행하여 다량의 차가 소비됨으로
차산지의 사찰은 다촌을 형성하여 그곳에서 자체적으로 차를 생산하기도 했다.
또한 선종의 성행과 함께 다선일체를 이룬 고승들이 많이 나왔다.
관료와 문인들의 차 문화
다 시
고려관료들의 차 문화는 재판 전에 갖는 사헌부의 다시에서 그 정점을 찾을 수 있다.
왕실과 사찰은 음다 행위가 사치의 극으로 치달을 때 같은 차를 마시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고려 관료와 문인들의 높은 정신세계를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시 정신은 조선말까지 이어져 내려와 우리 선조들의 홍익인간 사상은 애민정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겠다.
작금의 정치인 공무원 재벌들도 업무 시작 전 다시를 갖고 나라와 민족 환경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다원
각 지방에 다원을 두었으니 다정원, 다방원, 다중원, 다견원 등의 이름으로 요소마다 설치했다.
주로 왕가나 관료, 혹은 스님들이 이용했으며 숙박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숙박은 물론 음다도 가능한 휴식 공간이었다.
이의 시작은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다연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 책 273쪽 )
지배계층을 위한 시설로 조선 때의 객사 구실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경치가 좋은 명승지나
관사가 없는 곳에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 역할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한다.
다점
일반 백성들은 다점에서 차를 구입하고 마시기도 하면서 다반사와 같은 차 문화를 이룩하였다.
돈이 없으면 물물교환을 하여 차로 바꿔 마실 수 있고 만남의 장소로도 이용하고
차와 차 도구를 맡겨 놓고서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였다.
투차도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점에서는 차 외에도 여러 가지 생필품들도 함께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향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르인 만남의 장소로 청춘남녀의 남녀상열지사가
이뤄지는 고려 문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맺기
고려는 남북조시대의 신라와 달리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그 고토를 다시 찾고자 하는 민족정신이 강하게 나타난다.
중국과의 외교에서도 정치, 군사적인 것 보다는 문화를 우선시하고 적극 수용 우리의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불교를 너무 옹호하여 그로 인한 폐해가 국가의 살림살이가 궁핍해 지는 상황까지 일어난다.
고려는 불교와 차 문화로 이루어진 나라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고려의 차 문화는 남북조시대의 신라와 발해 등과 차이점은 계층을 초월한 차 문화이다.
이러한 음다 의식은 서민과 노비까지 영향을 미쳐 무신정권 때 계급타파를 외친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며 노비봉기를 꾀하기도 할 정도로
고려에 미친 차 문화의 영향은 지대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부지방의 농민봉기와 유민 발생은 차산지와 매우 밀접하다.
다소, 다촌 등이 있는 군, 현에 소금과 함께 차에 대한 과도한 수탈로 민중봉기와 유민의 발생 빈도가 높게 나타난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남부지방의 경작차밭은 거의 파괴되고 산중에 있는 사찰 주변의
차밭만이 남고 나머지는 방치되어 야생차의 길을 간다.
일례로 부안지역의 차밭과 차공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언급이 되나 이 후 완전히 파괴되어
여류시인 매창의 시에도 허균선생의 부안의 우반동 생활에서도 부안지역의 차의 자생에
대한 언급이 성소부부고의 도문대작 편에 남아있고 용차를 만들어 마셨다는 한 줄의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풍향차보를 쓴 이운해가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고창 선운사의 차나무를 채취하여
향약차를 만들었다는 내용만 서술되어 있지 부안지역의 자생차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려의 찬란했던 차 문화가 애석하게도 후대로 전승 발전되지 못하고 끊겨 버린 것은
자국의 차 산업을 보호 육성하지 못하고 가진 자의 관점으로만 수탈을 함으로써
외적의 침략과 왜구의 침탈로 그리고 왕권이 바뀌면서 다촌과 다소민들이 이탈하여
남부지방의 극히 일부분의 사찰 주위에 있는 차밭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작금의 차 문화계도 내 것의 보호 육성에 소홀하고 홀대하며
조선 500년 동안 우리 민족은 차 없이 살아 왔다 왜곡하며 내 것이 배제된 문화는
결국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으며 남의 차만 우선시되고 사대하는 문화는
대중에게 배척받아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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