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저 자순차와 금사천
중국 절강성 최북단의 장흥현 있는고저산은 해발 355미터로 그다지 높지 않는 고저산은 멀리서 바라보며
“붓걸이” 모양으로 가운데가 높고 양쪽이 낮다.
왼쪽은 자사개 오른쪽은 현구개라 부르는 두 개의 골짜기가 나있는 고저산은 태호로 뻗어있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2500년 전 지금의 소주에 있던 오나라 임금 합려는 동생 부개를
태호 서남쪽 장흥으로 보내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케 하였다.
그곳의 지형이 평탄하여 도읍을 삼을만한 곳이라 여기고 고저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고저산은 암반층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고 강우량이 풍부한 태호에 인접하였기 때문에 지하수가 풍부하다.
육우는 고저산의 차를 자순차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고저 자순차는 고저산 일대에서 나는 차로 고저산은 삼면이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차를 생산하는 다원은 이 구릉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고저자순차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크게 세 번 바뀌는데 당대의 자순차는 쪄서 눌러서 만들어진 병차였고 ,
송대에는 차를 쪄서 연고를 만든 뒤 단차를 만들었으며 명나라시대는 덖어서 만든 잎차의 형태였다.
차 잎의 모양은 죽순과 닮아있고 차의 잎이 여리고 곧고 조금 길다.
다경에는 자줏빛을 띄는 것은 상품이며 녹색 빛은 그 다음이고 죽순모양은 상품이며
잎의 모양을 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 고 기록하고 있다,
즉 잎이 말린 것이 으뜸이고 잎이 퍼진 것이 그 다음이다, 고저자순차는 천하의 제2의 명차라 했다.
자순차는 당시에 차의 극품으로 칭송되어 황제의 사랑을 받았고 ,
대력 원년에 육우가 고저산의 차를 추천하여 진공한지 5년이 지난 이후에
비로소 자순차는 정식으로 진공품의 명부에 올라 의흥과는 별도로 단독의 진공량이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입춘이 지나면 황제는 호주와 상주의 자사에게 직접 고저산으로 가서 진공의 일을 수행토록 명을 내렸다.
호주지사인 두목은 공차의 책임을 맡은 것을 고상하고 품위 있는 임무로 여겼다.
육우는 다경 茶之出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육우의 추천으로 자순차와 금사천은 대력 5년에 정식으로 진공품이 되어
80년을 풍미한 공차와 공천이 되어 금사천 샘물이 진공되었다.
하나의 무게 5-6량인 은병에 물을 담고 봉인하여 역마로 장안까지 운반하였다.
당시 황제는 자순차를 귀하게 여겼고 청명절에 황제는 제사에 올렸고 또 왕 공관대신들을 불러 잔치를 벌렸다.
대력5년(770)부터 두목이 고저산에서 修貢을 하며 시를 짓고 돌에 글을 새겼고
이후 80여 년 동안은 자순차와 금사천이 성황을 누린 시기이다.
금사천은 자사개 어귀인 고저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세가 낮은 편이어서
암반층의 틈새에 저장된 샘물이 주위의 압력을 받아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솟아난다,
이 샘물은 맑고 투명하여 햇볕에 비추면 금빛이 영롱하다,
때문에 이 일대 사람들이 이 샘을 金沙泉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저산의 차와 샘물은 이 일대에서 일찍부터 명성을 떨쳤지만
당나라 중기 이전까지는 수천 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있었다.
새로 빛을 발하는 천년의 공차와 공천
수백 년 동안 침묵을 지켜온 자순차와 금사천은 1970년 국가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자순차의 생산이 재개되었다.
1980년 금사천도 개발되어 중앙정부의 수질분석결과 양질의 광천수로
인체에 유익한 40여종의 미량원소가 함유되어있다.,
금사천은 저수량이 풍부하고 오염이 없으며 보급면적이 백여 리에 달한다.
1990년대부터 대당공천공사, 금사천공사, 금사공천공사등 세회사가 개발에 착수하여
이미 생산된 제품이 상해를 비롯한 대도시의 星級호텔과 항공편의 음료수로 공급되고 있다.
샘물을 마실 때면 그 샘물을 판 사람의 노고를 생각하는 법이다
장흥현 주민들은 장흥의 명산인 자순차와 금사천이 지금처럼 빛을 보게 된 것은
1200년 전의 선현인 다성 육우임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고저산의 금사천주위에 망귀정이란 정자를 짓고
육우차장관을 건립하고 육우상을 세운바있다.
금사천이다. 그들의 표현만큼 눈에 보이는 물색은 맑지 않고 탁하게 보인다.우리나라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음용수로는 불합격이다.
그러나 항주에서 본 물 중에서는 산속 계곡물을 빼고는 굉장히 맑은 물이다.
금사천과 주변에 있는 차밭을 배경으로
부산 이선주회장님과
망귀정에서 모두가 맨 우측은 현지인이다.
망귀정 중건에 관한 글을 새겨 논 표지석
간자체라 못 이해하겠더라........이런식이 되더라.
대 당 공 차 원 과 기 념 관
대당 공다원은 당나라 대력5년(770)에 건립되어 876년간 차를 공납해 왔다.
중국 역사상 제일 처음 전문적으로 차를 만든 황실 차창이다.
큰 규모와 오랜 기간 동안(차)을 공납한 것으로는 세계최고이며 ,전국문보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4월에 새로 세워진 대당 공다원은 육우각 , 길상사, 동량(동쪽복도) 서랑(서쪽복도)의 네 부분으로
다성 육우의 생애와 다경을 전시한 육우각과 입구에 문수보살을 모신 길상사가 남북방향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
다선일미의 이념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서랑은 유명인의 전고 ,마애석각 ,28명의 역대 자사등 3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
동량은 공차제다, 공차지식, 다예전승, 공차복원 등을 기술하여 공차의 기원을 나타내었다.
전체적으로 당나라 건축기법을 따라 넓고 웅장하며 , 육우각의 동서양쪽에는 쇼핑센터와 다실이 있어서 ,
휴식을 한곳에서 즐길 수 있어 자연경관과 문화가 잘 어우러진 차 문화 관광지구라 할 수 있고
공차원의 복원을 위하여 주위에 차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다.
공차원의 기념관 앞에서 모두가
육우각안에 있는 육우상 자니로 만들었다. 차엽박물관의 못난 육우가 아닌 호남형의 상으로 제작되어 있다.
2층인듯 총 3층으로 되어 있는 육우각. 중국 처자가 우리네 남정네들이 v자를 만들어 찍는 장면을 금방 벤치해서 찰칵하고 있다.
대당 공차원과 길상사 안내도이다.
육우각을 들려고 했더니 찍사가 이해를 못하고 그냥 찰칵했다.
육우각에서 바라 본 길상사.
동량에 전시되어있는 자사호들 매우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는데
우측 호 이싱에 있길래 가져 왔다. 지금 발효차 자사호로 사용 중이다.
이쁜것들이 유리관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 글은 부산의 이선주 회장님이 작성하시고 교정과 사진은 장춘동자 김계규가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