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홍차 문화
유럽에는 언제 차가 전래되어 영국에서 홍차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는지 많이들 궁금해 하고
홍차하면 영국이 떠오르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먼저 17세기에 해상권을 잡고 있던 네덜란드와 포르투칼의 상인들에 의해 중국의 차가 유럽에 수입된다.
영국은 포르투칼 출신의 캐서린 왕비가 결혼 지참물로 차를 궁중에 가져 와 티파티를 하면서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들불처럼 유행을 한다.
당시 영국의 음료수는 수질이 나쁘며 육류 위주의 식생활로 맥주나 와인으로 하던 시기로 거의 모든 국민이 알코올로 인한 고통을 받는 시기로
공장 노동자들도 산업재해가 빈발하고 알코올로 인해 싸움과 사보타지가 자주 발생하여 왕실과 자본가들에겐 골칫거리로 등장하였다.
파티에서 차가 정신을 맑게 해 주고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경험한 한 공장주에 의해 노동자들의 휴식시간에 맥주를 주지 않고
차를 음료수로 대체한 결과 안전사고와 싸움 등이 현저히 줄어들고 제품의 하자율도 낮아지면서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는 효과를 보았다.
이 효과는 모든 공장으로 티타임이 파급 적용되면서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가정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차의 수입이 급격히 늘어나고 차의 가격도 낮아지면서 전 국민의 음료가 되어 알코올에서 해방된 영국의 국력도 급속히 성장한다.
1721년에 영국은 네덜란드를 누르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동인도회사가 차 수입권을 비롯한 모든 것을 독점한다.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은 중국의 남부에서 대량으로 차를 수입해 갔다.
수에즈 운하를 개통하기 전이라 항로는 인도양을 건너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하는 길고 긴 항해는 일 년이 넘게 걸렸다.
그해 첫 생산된 차가 런던 경매시장에 첫 매물로 나오면 매우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 후 나오는 매물은 점점 낮은 가격에 경매되므로 선주들은 첫 경매에 사활을 걸었다.
범선은 점차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량되어 길고 뾰쪽하며 늘씬한 형태에 많은 돛대와 큰 돛대로 진화되었다.
이를 Cripper(클리퍼)라 하며 일 년이 넘게 걸리던 시간을 약 백일로 단축하였다.
이들은 누구의 배가 먼저 도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금액의 차이로 희비가 엇갈렸다.
또한 선주들은 배의 평형수를 빼내고 거기에 중국 경덕진의 다기를 비롯한 도자기들로 채워 배의 평형을 잡았는데
차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려 많은 수익을 올렸다. 차와 도자기를 팔면 범선 한척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영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본차이나 영국의 흙으로는 도자기를 만들 수 없었다.
중국도자기의 수입을 대체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하다
젖소의 뼈를 갈아 넣었는데 잘 깨지지 않는 도자기가 완성됐다. 광우병 파동 때는 푸리 후레온 검출로 수난을 겪기도 했다.
티 레이스라 명명된 이런 경쟁은 증기 화물선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동인도회사의 인도와 스리랑카의 다원에서 홍차가 생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
영국의 홍차문화는 세계사적으로 아주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만들어 역사를 바꾼다.
첫 번째는 미국독립의 단초를 제공한 보스턴티파티이다.
동인도회사의 차에 대한 고율의 관세로 영국의 식민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급진독립파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의 선박에 있는 차 상자들을 부셔 바다에 던져 넣거나 불을 지른 사건이 일어난다.
영국은 군대를 주둔시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보스턴 법안을 만들어 탄압하자 시민들은 단합하여 혁명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독립한 미국은 홍차가 아닌 커피를 마시는 나라가 되며 이 후 인디언에 대한 대대적 학살이 시작된다.
두 번째는 아편 전쟁이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도자기 비단 등을 수입하고 수출품은 약간의 향료와 모직물 정도로 대량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 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영국은 은이 모자라게 되자 극단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미얀마 등 골든트라이앵글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으로 대량 유입하여 중국 전역으로 밀매하기 시작한다.
아편은 민간은 물론 관료사회와 군대까지 파고들어 엄청난 국가적 사태를 맞고 은의 유출로 국가 재정이 흔들리게 되었다.
청 황실은 아편 금지령을 내리고 임칙서를 홍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주에 파견 아편 밀수를 단속 근절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 상인의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운 것을 영국이 트집을 잡아 철선 군함으로 양자강을 거슬러 오르며 남경을 위협하여
남경조약을 맺어 청조의 몰락을 가속화 시키며 오늘날 홍콩과 마카오를 식민지로 거의 모든 대도시에는 조차지를 요구하여 설치한다.
그리고 미국과 프랑스까지 끼워 같은 조약을 맺게 하였다.
홍차는 언제 어디서 만들어 졌을까 하는 의문들이 있을 것이다.
문헌상에 나타나는 것은 1600년대 복건성 숭안에서 처음 만들어 진 것으로 나온다.
영국은 중국에서 홍차와 녹차 등을 동시에 수입해 마시다 1840년대에 로버트 포춘이 인도 히말라야 기슭 다즐링 지방에
중국의 소엽차종으로 다원을 조성하여 45년에 영국 최초로 홍차를 만들어 기념비적인 항해에 오른다.
또한 야생차가 발견된 아삼지역에 대규모 대엽종 다원을 조성하여 본격적인 밀크티와 블랜딩 홍차의 시원을 마련한다.
스리랑카는 1869년도에 커피농장들에 병충해가 발생하여 커피나무들이 전멸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립턴이 아삼지방에서 차나무를 들여 와 커피 농장에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
불행하게도 일손이 부족한 스리랑카의 차밭에 일할 인부들을 인도 남부에 있는 타밀족을 기존에 있던 타밀족에 추가로 데려와
오늘날 스리랑카의 정쟁을 불러왔다.
현재 세계 3대 홍차는 중국의 기문홍차, 인도의 다즐링 홍차와 스리랑카의 우바 홍차이다.
영국의 티 타임은?
오전 6시의 리얼리 티(eary tea, bed tea)로 하루가 시작되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만들어 준다.
아침 식사와 함께하는 블랙 퍼스트 티(breakfast tea), 오전 11시의 일레븐스 티(elevenses tea),
오후 4시에 부인들이 간식을 먹으면서 마시는 사교의 시간인 미디 티 브레이크(middy tea break),
저녁 식사 후에 마시는 에프터 디너 티(after dinner tea),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시는 나이트 티(night tea)가 있다.
tip: 우리나라에서 홍차를 주문하면 레몬홍차를 내오는 경우가 많다.
이는 원래의 홍차향인 꽃향과 과일향이 좋지 않은 하급으로 잡향을 가리기 위해
레몬을 첨가하는 것으로 인도 스리랑카 영국 등에서는 인식하고 있다.
알고 마시면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 차 문화, 건강과 여유를 위해 많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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