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찾아 길 따라/전북과 부안 여행

부안을 사랑한 교산 허균의 발자취

긴 봄 2010. 6. 29. 22:37

부안에 꼭 살고 싶다했던 부안을 짝사랑한 교산 허균

그가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부안에서 활동한 행적을 찾아보았다.

부안의 자료에는 단순히 그가 매창과 만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정작 그가 부안에서 꿈꾸었던 이상향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에 발자취는 모두 지워져 있다.

들어가기에 앞서 부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부안군은 전라북도에 위치하여 동경126도 40분, 북위 35도40분으로 동쪽으로

김제, 정읍시와 남쪽으로 고창과 곰소만으로 서쪽은 서해안과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와 북쪽은 김제와 바다였지만 이제는 새만금과 군산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493평방미터이며 1읍 12개면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형태로 서해에 돌출되어 있는 남서부는

변산반도의 산이 겹겹이 싸여 있고 북동부는 넓고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해안선은 동진강 하구에서 줄포면 우포리까지 99km 가 되며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리는 기후적 특색을 가진다.

이 중 변산반도는 5개면에 접해 있고 면적은 157평방미터이며

허균이 말하는 우반동은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일대로 만화, 우신, 감불로 이루어져 있으며

변산반도의 남쪽에 위치하여 만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앞쪽에 천마산이 바다 바람을 막아줌으로 부안에서 제일 기후가 온화한 편이다.

 

허균은 1569년에 태어나 1618년에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형을 당한다.

1601년 6월에 허균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전운판관이 되어 세금을 거둬드리는데

이 때 호남에 내려와서 부안에 들렀다. 

허균은 매창을 처음 만났으며 매창의 외모에 대해 남아있는 유일한 내용의 글을 남긴다..

계생의 용모는 박색이라 썼다.

그러나 김제군수가 자기 아버지의 칠순잔치에 산하 군현의 관기를 불렸을때 수청기생으로 지목했는데

계생은 동진강 갯벌에 빠져 옷은 더렵혀지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굴은 갯펄을 묻힌 채

갯비린내와 땀내를 풍기며 한창 흥이 오른 잔치에 참석하여

김제 사또에게 핀잔을 듣고 밥도 얻어 먹지 못하고 쫒겨난다. 의도된 행동으로 보인다.

실제로 매창은 허균의 박색 타령 이후로는 한량들의 희롱이 줄어든다.

허균의 자유분방한 여성 편력도 유희경과의 관계로 매창과는 스승의 연인으로 이성의 친구로,

시세계의 동무로 , 참선과 다도의 도반으로 정신적 문화적 관계만 맺는다.

허균은 조관기행에서 

“계생은 부안의 창기이다.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고 적고 있다.


허균은 전라도의 해안에 있는 고을을 그 해 12월까지 돌아다니며

전운판관으로서 공세를 징수하다가 형조 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간다.

이 때 허균은 전라도의 여러 고을 중 부안에 애착을 가지게 되며

은퇴 후에 말년을 보내고자 계획을 한 듯하다.

허균의 관직 생활은 평탄하지가 않다. 

우선 그의 파격적인 말과 행위로 정적들에게 성품이 경박하고 성개념이 무절제하다 하여 

수차례 탄핵의 원인이 되어 복직과 파직이 이루어진다.

1608년 부안의 우반동에 내려 올 때까지 수안 군수 파직, 삼척 부사 파직, 공주목사를 파직 당하였다.

 

허균은 부안에 내려 와 머물던 정사암을 중수하면서 썼던 중수 정사암기에 다음과 같이 썻다 한다.

“부안현의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동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 곳 출신의 부사 김 청이 그 중에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이라고 이름 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 해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적이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영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올 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 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지런히 하여 그 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서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를 더 들어가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이었다. (중략)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다가 늙은 당 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 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다.

(이하 생략)


허균은 이곳을 수리하여 살면서 주변에 있는 폐 사찰의 주위에서 야생차밭을

발견하고 그 차를 이용하여 차를 만들어 마신 것으로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저서 성소부부고의 도문대작편에 

순천에서 나는 작설차가 제일 좋고 변산에서 나는 것이 그 다음이다”. 라고 했다.

허균은 이때 매창과 변산의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매일 어울리다 시피하며

제자 겸 도반으로 참선과 이상향의 세계에 깊이 빠져 든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최초의 국문 소설 홍길동전을 구상 정리하였으며

훗날 함열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 쓴 성소부부고의 초안도 마련한 듯 보인다.

지금 정사암에 대한 정확한 위치와 내용을 아는 이는 없다.

역적이 거처한 곳이라 하여 철저히 파괴하고 기록도 남기지 않고

접근과 언급에 대해서도 제한하는 등 역적에 대해 철저히 말살하는

조선의 통치 방법과 조선 최후까지 복권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양반 관료 출신의 양반사회를 부정한 사상적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인지

아니면 허균이 부안 민중과의 접촉이 적음으로 해서 그에 대한 자료들이

부안의 민중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간이었던 부안의 발자취는

그의 기록에 의해서만 아주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정사암의 위치는 촌로들의 말을 종합하여 추정해 보면 가장 근접한 곳으로

선계폭포 위쪽에 있는 옛날 변산의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선계사라는 절터가

있었던 곳으로 선계안이라 하는 곳이 그중 하나로 세봉우리가 감싸고 계류 위 절벽위에

집을 지은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절벽과 험한 접근로로 인해 은둔의 거처로는 알맞은 자리이다.

김 청의 아들이 너무 외따로 떨어져 관리하기 어렵다고 얘기 한 곳으로도 가장 근접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던 제각이 남아 있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으며,

절벽 위 집터는 언제 적에 집이 없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대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육안으로는 조사를 할 수 없으며 집터 안쪽으로 접근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또 하나는 선계폭포 아래로 지금은 저수지가 되어 버린 곳이다.

수몰된 저수지에서 선계 폭포와 폭포수가 고인 연못을 직접 볼 수 있으며

고려 때는 청자를 굽고 조선시대에는 분청을 굽던 가마터가 여러 곳 존재하고

절벽바위들도 여러 곳에 있는 등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일명 굴바위라 하는 곳과 야생차 밭이 있는 감불 마을 등이 있으나

그의 기록하고는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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