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풍향차보 12

부안현감 이운해의 실사구시

이운해는 부안현감으로 1754~56년까지 재직하였다.그 때 차를 이용할 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그 당시에 가장 흔한 병증 7종에 대해 차와 한약제를 혼합하여부풍향차를 만들고 그 기록을 남겨 부풍향차보라 명명하였다.그리고 부안의 대표적 산업이던 도자기산업에도 관심을 두었다.부안은 고려청자의 주산지였으며 몽골의 지배하에서는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설치되어 일본정벌을 위한 배를 건조하였다.이 시기 고려의 청자는 쇠퇴기를 맞으면서 땔감이 부족하게 된 부안청자는 급속하게 해체된다.조선에 들어선 부안은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풍부한 백토와 황토를 이용한 옹기와 항아리 등을 만들고 유통하는 전라도 지역 최대의 도자기시장을 형성한다.고려 때 안흥창이 설치되었던 보안면 유천리에서 정유재란 때 왜구의 피해..

부풍향차보의 차명

임진, 병자 호란 이후에 조선의 여성들은 엄청난 탄압에 직면한다. 우선 부모의 재산을 물려 받았던 상속권이 박탈 당하며 출가외인이란 단어로 친정과 단절을 요구 당한다. 시댁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칠거지악을 외치며 자녀가 없이 남편이 사먕할 경우 열녀를 강요 당하고 다행이 자녀 중 아들이 있으면 가족으로 인정을 받는 세태가 되었다. 조선은 안정기에 접어들며 경제 의학발전으로 인해 수명이 길어지고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며 여성의 홧병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아이러니는 한국이 여성의 갱년기를 화병이란 병증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사)부풍향차보존협회 긴봄이 한천 이재를 추적해 본 결과 이운해현감은 스승 이재의 한천정사 이념에 따라 부풍향차보를 저술하고 지금의 출판기념회 또는 논문발표와..

부풍향차보 : 부안은 차 조공지가 아니다.

부안과 무장은 3사지 떨어져 있다. 흥덕현 다음에 고창현이 있고 다음에 무장현이 있다. 현재 선운사는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고창군 아산면 소재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접근하는 방법이 고창이나 무장을 통하지 않고 부안군 남포 또는 구진포에서 배로 선운사 앞 좌치나루까지 바로 건너가거나 육로를 이용하여 흥덕에서 갈 수 있어 접근성에서 다른 곳보다 유리했을 것이다. 부안 현감이 왜 부안에서 차를 채취하여 만들지 않고 멀리 현재의 도로를 이용해도 43km나 되는 고창 아산면의 선운사에서 차를 따다 향약차를 만든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시 부안은 토산품에 작설차는 없다. 동양 삼국의 차에 대한 수탈은 다른 토산품에 비해 너무나 가혹하여 려말선초의 민란 횟수 중에 차 산지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고 강도..

부풍향차보 시대적 환경

이운해는 부안 현감으로 1754년 10월 3일부터 1756년 10월 9일까지 재직했다. 그는 부안 현감으로 오기 전부터 초창기 실학자들처럼 차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으며 효능에 대해서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임하여 업무에 적응한 후 차가 있고 채취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본 결과 나주목 관할 무장현 선운사의 차가 관청에서 관리하고 있지 않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당시 부안현은 차가 토산품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차나무가 없었다. 주변 고창, 정읍, 옥구 등은 차나 작설차를 납품하기 위해 관청에서 관리하는 최소한의 차 재배지가 야산이나 사찰 주변에 존재하였다. 선운사는 흥덕, 고창, 무장에서 접근하기 쉽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다른 관청의 토산품 납품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차를 채취한 것으로 보인..

부풍향차보의 저술 연대

1. 부풍향차보의 저술 연대 조선 후기 영, 정조 시대는 유교 사상과 서양의 종교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동서문화의 충돌기로 면면하게 이어지던 차문화도 연경과 복건성 무이계곡을 다녀온 사대부와 실학파 그리고 남부지방 사찰의 승려들에 의해 부활하는 시기이다. 이운해현감은 1710년생으로 몰의 연대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부풍향차보의 저작 연대는 표기가 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추론은 부안 현감으로 재직하던 1755년 또는 56년에 쓴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54년도 저술은 그해 10월에 부임한 현감의 업무 여건으로 볼 때 불가능하여 모두가 제외한다. 본 고는 저술 시기를 1755년 또는 56년으로 추론한다. 이유는 일반적인 제다시기에 작설차로 만들었을 경우는 1755년 봄철에 찻잎을 따서 향차를 만들고 부풍향차보..

부풍향차보의 재해석 1

조선의 대문장가이자 외교관이며 사상가였던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부안의 차를 극찬하였다. 100여년 후 부안현감으로 부임한 이운해는 차를 이용할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 당시 일반적 병증 7가지에 대하여 차를 이용하여 증상에 따라 한약재를 우린물을 섞어 차를 지었다. 부안의 별칭을 붙여 부풍향차보라고 명명하였다. 중국 한나라의 수도 함양을 보위하던 성읍의 명칭인 좌 풍익 우부풍에서 따와 조선 왕가의 본향 전주를 보위한다는 의미로 부안을 부풍으로 부르며 객사를 부풍관이라 하고 현판을 걸었다. 이는 임진, 병자 양난 이후 조선에 몰아닥친 소중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성읍에 중국 한나라의 성읍명을 별칭으로 부르던 영향이다. 부풍향차보 원전은 전하지 않고 현 고창의 성내면에 거주했던 조선 후기의 달필가이자 한천 ..

부풍향차를 체험하며

부풍향차는 찌질이 군왕과 비겁한 양반들의 책임 회피와 전가 정책으로 임진, 병자호란으로 시대적 핍박을 받아 지위가 낮아지는 조선 후기 여인들의 한과 설움의 홧병을 치유해 주기 위한 차치유 최초 시도였다. 우리네 조선의 여인들은 21세기에 들어 밝혀진 갱년기란 질병을 세계 최초로 홧병이라 이름하고 병자호란 이후 계속해서 극복하고자 노력해왔다. 부안현감 이운해는 이를 차와 약재의 융합으로 조선 여인들의 홧병과 장수하는 남정네들의 중풍을 치유하는 처방으로 차를 짓고 그 이름을 부풍향차보로 명명했다. 백성을 위한 해 쓴 최초의 다서 내용을 따라 변산제다.부풍향차보존협회의 긴봄은 부풍향차 만들기 체험을 부안동초 5-2학생들과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