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제다 521

은선리 돌방무덤 19호와 미지정 무덤

부안의 원효방과 의상봉에 대한 기록이 있다. 원효와 의상이 중국으로 불경공부를 가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날이 저물어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잤다고 한다. 원효가 목이 말라 손을 더듬으니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 시원하게 마시고 다시 잠을 잔 후 다음날 아침에 물바가지를 보니 사람의 해골이었다고 한다. 이 정도 크기면 장정 3명은 너끈하게 눌수 있다. 원효가 중국에 유학을 가던 시기와 돌방무덤이 형성됐던 시기는 200여년 차이가 난다. 위례에서 사비로 내려왔던 시기로 일부 왕족 그 추종세력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했을 확률도 높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어설프게 보일지 몰라도 그 시절에는 이 정도의 무덤을 만들려면 지배층에 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돌방무덤의 형태를 보면 흙으로 덮었던 것도 있고 그냥 돌판이 ..

한국춘란 주금화 - 주홍보

변산제다의 긴봄은 직장에 다닐 적에는 설명절이 마음 편하게 산채를 다니는 시간이었다. 산채를 다녀오던 길에 5시가 가까워 어두워지는데 막판에 야산 디지기를 하자고 해서 마을옆의 산에 내려 주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내려 오지 않아 찾아갔더니 주금화가 나온다고 하면서 열심히 꽃대를 까보고 있었다.

한국춘란 주금소심 - 천수

변산제다의 긴봄이 어느 해 설날 차례를 지내고 처가에 가서 인사를 올린 후 점심을 먹고 가까운 고창의 어느 산에 올라 대주의 꽃대를 까보는 순간 대륜의 소심이 까꿍하고 인사를 한다. 여러 개의 꽃대가 있어 다시 한 대의 꽃대를 까보았는데 주금색이 전체적으로 들어 있었다. 그 후 기대와 달리 주금색쪽이 발달하지 않고 일반 소심만 발현해 버렸다.

은선리 마한백제의 석탑

변산제다의 긴봄은 이런 생각을 한다. 백제 땅에 남아있는 석탑은 거의 고려 때 석탑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고려 때 조성된 석탑도 있겠지만 한눈에 봐도 백제의 탑을 고려의 탑이라고 한다. 고인돌을 만들던 DNA가 마한백제의 피에는 흐르고 있어 그 결정체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석탑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은선리 석탑은 백제 초기석탑과 중기의 혼용쯤으로 여겨진다. 정읍에 있는 백제의 초창기 형태를 띤 석탑들은 한기씩만 서 있는 경우가 많다.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찰의 석탑은 거의가 쌍탑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왕궁리 석탑처럼 은선리도 지방 왕족의 궁궐터가 아닐까도 뒷산의 수백기의 돌방무덤과 건너편의 왕릉급 능을 보며는... 건너편의 산에도 훼손되고 묻혀서 방치되고 있는 돌방무덤들이 산..

은선리 고분 18호

변산제다에서 정읍 영원면의 은선리까지는 직선거리는 11km 밖에 안된다. 영원에는 백제 돌방무덤이 수백기가 있다. 왕릉급의 릉도 존재하고 있으며 백제시대의 돌탑이 있으며 고부와 덕천에도 있다. 왜 백제의 탑을 상층부의 조각이 섬세하다고 시대를 후퇴시켜 고려의 탑으로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한백제인들의 DNA에는 고인돌부터 시작한 돌을 다루는 기술이 석가탑 다보탑에서 꽃 피운것을 알고 있으면서 부정하고 후퇴시키는 것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일 것이다. 관리번호 18호분으로 은선리 고분 중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고 돌을 따듬은 솜씨가 정교하다. 입구의 오른쪽 돌벽이다. 글이나 그림 등을 남겼을 것 같은데 흔적이 없다. 워낙 훼손되고 노출이 되어서 이나마 남아있는 것도 다행이다. 좌측..